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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이상이란 허구, 도덕의 기원과 실체.

by 신그자체김상범 2022. 5. 3.

이 글은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도덕의 계보학(1887)과 안티크라이스트를 바탕으로 제작하였습니다.

도덕의 계보학

 

 

 

 

 

 현대사회는 그 자체로 인간 욕망의 풍경화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 사회는 우리를 끔찍하게 엮어 놓고있다. 현대 사회의 이명이 초연결의 사회라는건 명백하고 그 연결 역시 개개인의 욕망이 내린 방향성이다. 하지만 사실 우리 개인 모두에게 남은 각각이 모두 거대하고도 어두운 심해속과 같아야 한다. 우린 절대 남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본디 인간의 삶은 자신 이외의 혼돈, 카오스에 대한 자신의 로고스와 파토스의 발현들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 용기없는 인간들은 이 카오스를 견디지 못했다. 우리는 연결될 뿐만 아니라 서로 같아지기도 원한다. 이 카오스를 눈앞에서 없애줄 질서와 동일성을 원했다. 그렇게 인간의 욕망은 다시 나타났다 그 얼굴은 한 시대의 정신이기도 했으며, 돈이라는 상징적인 가치이기도 하고 또 수많은 종교의 신들이기도 했다.

얼핏봐서 전혀 동일하지 않은 이 얼굴은 무질서의 해소라는 측면에서 동일하다. 돈, 명예는 세상에 덩그러니 놓여진 인간에게 그가 가야할길을 정해놓은 이정표의 역할을 하고, 종교는 좀 더 나아가 인간이란 존재의 탄생까지 이야기한다. 이렇게 우리가 알게모르게 휩쓸리게되는 가치들의 기원은 인간의 욕망해소와 깊은 관계가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말을 쉽사리 받아들이지 않는다. 당연하게도 그건 우리가 스스로 발전한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이미 종교와 명예같은 시대정신들은 이전의 지위를 잃었고,현대의 가장 큰 정신이라고 할 수 있는 자본주의도 사회에서 돈이 갖는 위치에 비해서 평가는 좋지않다. 심지어 누군가는 자본주의라는 인간의 욕망의 가장 큰 의지 획일화(미디어가 앞장서는 획일화, 피로사회)를 가장 앞장서서 멋지게 비판하기도 한다.

심지어 우리는 지금의 시대를 다양성의 시대라 자부하는데 이런 사회에 어떻게 인간이 동일화를 원한다고 할 수 있냐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미루어 봤을때 니체가 현재 이 나라에서 가장 많이 읽히는 철학자중 한명이란 사실은 아이러니 하지만 동시에 그렇지 않다. 100년전 절대정신으로 추앙받던 신의 머리를 깨버리고 우주란 카오스를 우리 인간들에게 그대로 돌려준 니체는 정말로 다양성이란 시대정신의 얼굴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난 그가 지금 이 순간 깨어난다면 다른 어떤 때보다 분노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리고 일어난 그 상태에서 망치라고 불리는 펜을잡고 다시 한 번 이 세상의 머리를 후려칠거라고도 확신한다. 그것은 공격받던 이전의 질서 사이에 숨어있었으면서 교묘하게 우리를 집어삼킨 가장 교활한 욕망, 약자의 욕망, 도덕을 향한 망치이다.

 

 도덕이라는 개념 만큼 모호하면서도 널리 받아들여지는 개념은 없을것이다. 그 형태는 마치 법이나 규율처럼 어떤 행동의 권장, 금기와 같지만 사람들은 도덕의 근원은 모두의 마음속에 있는 (마치 칸트의 정언명령같은) 양심이라고 한다. 앞의 말에서 봤을때 도덕이 받아들여지기 위해선 두가지 부분중 하나에 대한 증명이 필요하다. 만약 도덕이 규율과 같다면 그 규율을 제정한 자가 필요하고 규율이 모든 인간에게 당연히 있는 양심이라면 양심이 정말 인간의 속에 있는지에대한 증명이 필요한 것이다.

현대의 이전 도덕의 근거는 그 것을 제정한 자를 바탕으로 유지됐다. 바로 신이다. (모든 지역은 아니었다 인간적인 감정을 강조하던 그리스로마의 신, 고대 인도지역의 브라만교는 도덕과는 거리가먼 이야기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과학적 증거들과 니체를 필두로한 철학자들의 논증으로 그 가능성이 사라지자 자연스레 사회는 두번째 가능성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들은 이제 ‘마음에 당연히 있어야할 양심'이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을 찾아나선다.

 

 사이코패스, 소시오패스의 발견은 이런 시도의 한 예시다. 이 두 개념은 현실에서 널리 그리고 아무런 문제없이 받아들여지는 개념이지만 소시오패스가 실제 분류되는 병명이 아니고, 사이코패스는 같이 전두엽 질환이라고 평가받는 ADHD , 자폐성 장애와는 달리 일상생활에서도 유무를 판단하기 힘들며, 소시오패스, 사이코패스가 반드시 범죄 행위를 저지르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이 두 집단의 비중이 전체 인구의 무려 5% 정도나 되는 등 명백한 장애이라고 보기 힘듦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일반적이지 않은(장애를 가진) 사람으로 묘사된다. 이 뜻은 반대로 일반적인 인간은 필수적으로 공감, 이타성을 가져야하는 존재라는걸 내포한다. 이런 함축을 과거 중세시대의 해석과 비교하면 비슷한점이 있다. 그 시대엔 사이코패스, 소시오패스같은 집단의 인간를 악마에 씌인것으로 묘사한다. 신을 믿는, 믿어야하는 인간은 이런 악한 짓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비록 지금의 해석이 훨씬 영리하고 과학적일 지라도, 인간의 내면에 있는 이기성을 인간이 아닌 것으로 몰아세운다는 점에선 굉장히 유사하다.

 

 하지만 니체는 사람들의 이런 시도가 맞건 틀리건(전두엽의 손상이 공감능력에 영향을 주던 주지 않던) 자신만의 방식으로 이 도덕의 허술함을 증명해낸다. 만약 양심이란 것이 정말 인간 모두에게 존재해야하는 것이라면 이 양심의 존재는 과거 인간사회의 태동에서 부터 존재했어야 한다. 그리고 만약 그렇지 않은 종족이 있다면 그 이유 역시 설명해야한다.

 이를 오래전부터 알고있던 도덕론자들은 당연하게도 도덕이 자립할수 있는 방법을 찾아나섰다.. 니체의책 ⌜도덕의 계보학⌟에는 당대에 이런 도덕 계보학자들의 개념이 쓰여져 있다.

[도덕의] 본래적인 동인과 주도적인 요인을, [도덕의] 발전을 규정하는 결정적인 요인을 찾으려고 한다 도대체 무엇이 이 심리학자들을 항상 이런 방향으로 몰고 가는가? 그 것은 인간을 왜소한 존재로 만들고 싶어 하는 은밀하면서도 악의적이고 천박하며 아마도 자기 자신도 모르는 본능인가? 그들은 이렇게 선언한다. “원래 비이기적 행위란 그 행위가 고려했던 사람들, 즉 그 행위로 인해 이익을 얻는 사람의 관점에서 찬양되었으며 선한 것으로 불렸다. 그 후 사람들은 이 찬양의 기원을 망각하게 되었고 비이기적 행위가 습관적으로 항상 선한 것으로서 찬양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이 행위를 또한 선한 것으로 느끼게 되었다. 마치 그 행위가 그 자체로 선한 것이기라도 한 것처럼.”

은혜에 대한 좋은 감정과 좋음의 인과관계에 대한 망각을 전제로 이들은 좋음이 호혜적인 행위이며, 선이라고 말할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니체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좋음'이라는 가치판단의 기원에 관한 저 가설이 역사적인 근거가 없다는 점은 차치하더라도, 그 가설은 자체 내에 심리학적 모순을 포함하고 있다. 비이기적 행위의 공리성이 그 행위에 대한 찬양의 근원이고 이러한 근원이 망각되었다는 것이지만, 이러한 망각이 도대체 어떻게 가능하다는 말인가? ... 사실은 정반대이다. 오히려 공리성은 모든 시대에서 일상적으로 경험할 수 있던 것이며 따라서 항상 거듭하여 지속적으로 강조되어왔다.  

이들이 사용한 망각이란 도구는 그들의 선을 좀 더 순수하게 표현하기 위해 사용된다. 비이기적 행위를 통해 느끼는 감정이 집단의 공리로 발전됐다는 것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알고있는 일반적 의미의 선의 개념과 일치하지 않는다. 공리는 이기적, 이타적과 무관한 개념인데 반해 우리가 아는 일반적인 선은 비이기적인 행위와 직결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공리성이란 개념을 어느순간 망각해버리고 비이기적 행위만을 찬양하기 시작했다고 말함으로써 공리주의적인 선과 일반적인 선이 같은 뿌리에서 왔고 심지어 공리성이 선이란 개념에 선행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들의 설명이 무색하게 니체는 공리성이라는 결과물이 시대를 통해 계속 강조된 개념이란걸 분명히 하며 이런 주장을 비판한다. 오히려 사람들은 공리성을 위해 비이기적행동을 강요받기도 하는데, 이런 선을 공리성에서 우연히 나온 결과물로 볼 수 있냐는 것이 그의 견해다.

 

‘좋음(gut)'은 여러 언어에서 각기 다르게 표현되고 있다. 그러한 표현들이 어원학적 관점에서 원래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탐구함으로써 나는 그러한 표현들을 올바르게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 즉 모든 언어에서 신분을 나타내는 의미에서의 ‘고귀한’, ‘귀족적인'이 근본개념에 해당하고, 이것이 ‘정신적으로 고귀한', ‘기품 있는’ ,’정신적으로 특권을 지닌'이라는 의미의 ‘좋음'으로 필연적으로 발전해가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의 발전은 ‘비속한'. ‘천민의’, ‘저급한' 을 마침내는 ‘나쁨’ 이라는 개념으로 이행하게 되는 다른 의미 발전과 항상 평행하여 진행된다.

반면 니체는 좋음의 역사적 의미를 그시대의 증거인 어원학에서 찾아낸다. 그가 발견한 여러 언어들에서 좋음을 나타내는 단어들이 그 사회의 귀족을 지칭하는 단어에 뿌리를 두었고 반대로 평인, 천인을 지시하던 언어들이 당시의 사회가 사라지고 나선 천함, 나쁨을 의미하고 귀족을 지시하던 언어들이 좋음 선함을 의미하게된다.

  • 독일어의 schlecht(나쁨)과 sclehtweg(단지), schlechterdings(단순히),평민을 의미하는 단어의 관계
  • 그리스어로 귀족을 의미하는 εστλος(에스톨로스)가 이후 진실된 자 라는 의미로 정착하고 평민을 의미하던 κακος(카코스) δείλος(데일로스)라는 단어가 이후 비겁함, 야비함의 의미를 갖게된 것
  • 아름답다는 뜻을 가진 게일어가 본래 귀족을 특징짓는 단어였단 점
  • 라틴어 bonus(좋은)의 고어형 duonus 전쟁, 전사를 의미하는 bellum 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는 점

 이는 라틴어나 유럽쪽 계열이 아닌 언어에서도 드러나는데 음이 아닌 뜻을 표현하는 중국의 한자에서도 귀족은 그 자체로 고귀하다, 귀중하다같은 말들과 같은 한자를 품고 있으며 천민을 의미하는 노비의 비(婢)에는 천함과 비굴을 뜻하는 의 비(卑)가 그대로 담겨있다

언어학을 이용한 니체의 증명은 그것이 실제 도덕의 내용에 관해서 전혀 논증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현대의 도덕관은 스스로의 존재를 의심받는다. 도덕의 생물학적 종이 드러났다. 도덕이 고대의 인류부터 자연스럽게 존재하던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역사적 어느 순간에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며 그저 법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한나라의 법이 다른 나라의 것보다 우월하지 않은 것처럼 도덕도 다른 인간의 사상들보다 우월한 사상일 수 없게된다.

그렇다면 이 도덕은 도대체 언제 어디서 만들어졌는가? 진짜 도덕의 기원은 무엇인가? 니체는 이에 대한 대답을 찾기위해 당시의 고대 사회의 또다른 지배자였던 성직자들을 언급한다

최고 세습계급이 동시에 성직자 계급이며 따라서 그 계급을 전체적으로 특징짓기 위해 성직자의 기능을 상기시키는 술어를 선호하게 되는 경우에도. 정치적 우위를 나타내는 개념이 언제나 정신적 우위를 나타내는 개념으로 귀착된다는 이러한 규칙에는 지금까지 어떠한 예외도 존재하지 않는다.(예외가 나타날 수 있는 계기는 있을지라도). 이 경우 ‘순수함'과 ‘불순함'이 신분적인 차별의 표시로서 서로 대립한다. 그리고 여기에서도 ‘좋음'과 ‘나쁨’이 나중에는 더는 신분을 나타내지 않는 의미로 전개된다.

  니체는 고대의 사회를 지배층에 따라 두가지로 나눈다. 하나는 앞에나온 귀족적인 지배자를 갖고있는 사회 (그리스와 로마가 대표적이다). 최고 지배자가 성직자계급인 사회(인도의 브라만등이 있다)이다. 이 사회는 앞에서 말한 귀족적인 사회와 구조적으로 같지만 최고의 정신적 우위가 상징하는 바는 순수함과 불순함이다. 이 고대의 순수함과 불순함은 계급의 개념으로 받아들여졌고 (피를 다루는 직업은 그자체로 불결하기에 천한 계급의 직업이었다) 이후 각각 좋음과 나쁨의 의미로 전개다는 점에선 같았다.

한편 바로 성직자적 귀족사회에서 가치평가의 대립이 왜 그렇게 일찍 위험한 방식으로 내면화되고 첨예화될 수 있었는지가 본질적으로 성직자적인 귀족사회의 전체적인 성격에서 분명하게 밝혀진다. ...

안티 크라이스트

 

 그러나 성직자적 귀족사회는 그냥 귀족사회와는 다른방식으로 이 좋음, 나쁨이 내면화된다. 일반적인 귀족사회는 강함, 용맹함을 좋음으로 내면화했고 반대인 나쁨은 비굴함으로 내면화 했다면 성직자적 귀족사회는 순수하지 않은 인간들이 원하는 세속적인 가치를 나쁜것으로 평가하며 스스로를 세속적인 가치에서 멀리하고 정신성을 추구하는 방식으로 내면화했다.

이 두가지 의미의 ‘좋음’에서 우리의 ‘좋음'은 성직자의 ‘좋음'과 비교적 닮아있다 -하지만 이 성직자적 좋음도 철저히 계급적이었기에 이타성과는 거리가있다. 지금 말하는 것은 정신적인 가치를 높게사는 현대사회를 말하는 것이다.- . 즉 지금 세계의 도덕이 성직자적 ‘좋음’ 기원을 두었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며. 이 성직자의 ‘좋음'이 도덕으로 바뀌는 과정을 알게될 때 도덕의 창조 신화를 바로 잡을 수 있게 된다.

성직자적 평가방식이 귀족적 평가방식에 대해 승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직자적인 계급과 전사 계급이 서로 질투하면서 대립하고 승자가 누구인지에 대해서 서로 합의를 보려하지 않을 때마다. 성직자적 평가방식은 기사적, 귀족적 가치판단과 정반대의 것으로 전개되었다. 기사적, 귀족적 가치판단은 강한 육체 젊고 왕성하며 넘쳐흐르기까지 하는 건강, 그러한 건강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조건들, 즉 전쟁, 모험, 사냥, 춤, 투기와 강하고 자유로우며 쾌활한 행동을 포함하고 있는 모든 것을 그 전제로 한다. 이에 반해 우리가 앞에서 보았듯이 전쟁은 그들에게 가장 불리한 것이다! 성직자들은 잘 알려져 있듯이 가장 사악한 적이다. 왜 그런가? 그들은 가장 무력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서 증오는 무력함으로부터 생겨나서 기이하고 섬뜩한것. 가장 해로운 것이 된다. ... 예를 하나 들어보자. 이 지상에서 ‘고귀한 자', ‘강력한 자', ‘지배자', ‘권력자'에 대항하여 행한 그 어떤 것도 유대인들이 이들에 대항하여 행한 것에 비하면 언급할 만한 가치가 없다. 성직자적인 민족인 유대인들은 궁극적으로 자신의 적과 정복자들의 가치를 철저하게 전도시킴으로써, 즉 가장 정신적인 복수를 하는 방식으로 보복할 줄 알았다.

 도덕의 창조 본래 본인들의 신분을 과시하기 위해서 사용되었던 반육체적인 정신성이 그들을 위협하는 투쟁적인 귀족계급에 대한 복수의 재료로 쓰일때 마침내 도덕이 탄생했다. 그러나 이 정신을 더이상 특수한 귀족, 권리인들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모두의 것이다! 그 귀족적 지배자들이 자신들을 약자로 만드는 순간(니체는 유대인을 그 대표적인 예로든다) 그들만의 정신은 , 그들을 강자로 만들었던 정신은 모든 약자의 것이 되었다.

유대인들은 이렇게 말한다. “비참한 자만이 선한 자이고, 가난하고 무력하며 비천한 자만이 선한 자이다. ... 고귀하고 강력한 자들, 그대들은 영원히 사악한 자, 잔인한 자, 탐욕스러운 자, 신을 부정하는 자이고, 그대들이야말로 또한 영원히 축복받지 못하는 자, 저주받은 자, 유죄판결을 받은자가 될 것이다!” ... 즉 유대인과 더불어 도덕에서의 노예반란이 시작된다. 이 반란은 20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우리가 오늘날 그러한 반란을 의식하지 못하게 된 것은 그 반란이 계속해서 승리해왔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도덕의 기원에 대한 오해를 없애고 그것을 바로잡는 과정을 마쳤다. 우리가 도덕이라고 부르는 것, 그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복수의 도구였던 것이다. (니체가 그리스도교로써 표현하는 것은 단지 대표적인 예시일 뿐이고 그가 진정으로 밝혀낸 것은 ‘이타성을 전재한 정신’의 민낯이다.) 이제 이 기원을 넘어서 우리가 집중해야할 것은 이것이다. '복수와 정신적인 고양, 애정, 사랑, 이 상반된 감정들이 하나의 개념에는 어떤 모순들이 존재하는가?', '그렇다면 모순되지 않은 높은 정신성(가령 예수)이라는 것은 실제로 우리를 더 좋게 하는가?', '도덕은 하나의 사상으로써라도 유익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