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치란 책은 전락하는 책이다. 그것도 극 중의 거의 모든 인물이 자기 자신의 결함으로 인해 파멸로 빠지게 되는 이야기다. 모든 이야기의 중심에는 주인공이자 책의 제목처럼 백치인 미쉬킨 공작이 있고 공작은 이들의 파멸을 가속하고 본인 자신도 파멸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궁금했던 것은 왜 공작이 백치인가 하는 점이었다. 책의 상당 부분 동안 공작은 백치라기보단 성자 같다. 공작은 거의 나쁜 감정과 무관한 사람처럼 보인다. 그가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가 가진 감정들에는 악의가 없다.
작중에서 공작이 백치라 불리는 것은 어느정도 시대상과도 연관이 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의 특징이자 장점처럼 이 소설의 인물들은 작가가 바라보는 당시의 러시아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당대의 러시아는 극심한 격동기이다. 기존의 하나였던 가치가 무너지고 어떤 가치도 그것을 대체하지 못한채 유령처럼 배회하는 세상이다. 세계에는 돈과 직위를 위한 온갖 종류의 모략이 판치고 있다. 예빤친가와 이볼긴 가 사람들은 중류층과 서민층에 속하며 이런 욕망을 대표한다. 그리고 공작은 요즘 시대의 작품에서도 많이 보이는 극단적인 선한 주인공처럼 이런 욕망의 사이에서 절망하고 고뇌하는 사람처럼 보인다.
실제로 내가 책에 대해 읽은 많은 글에선 공작의 파멸을 시대에 대한 절망쯤으로 묘사하는 일이 많았다. 하지만 난 공작이란 인물의 위치가 이런 평가와는 완전히 다르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책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뤄지는 욕망은 돈과 권력이 아닌 사랑에 대한 욕망이다. 아까 말했던 온갖 종류의 모략에는 나스따시야라는 여인의 결혼이 깊게 관계되어있고 예빤친 가의 가장 큰 계획과 고민도 역시 자신의 딸들 그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아글라야의 결혼에 대한 내용이었다. 공작과 함께 작품의 핵심인 두 여자는 정확히 그 모략의 희생양이거나 거래 대상이다. 그런데 거기에 공작이 나타난다. 그는 수년간 외국에서 요양생활을 하다 러시아로 복귀한 완전한 이방인이다. 그는 러시아의 현재 상황에서 기인한 이런 교활함에서 벗어나있는 느낌을 준다. 또한 공작이 오랜 시간 고독으로 쌓아올린 정의로운 사상과 행동들은. 두 여자가 동시에 공작을 사랑하게 하는 동기가 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이 책의 끝에서 공작은 두 여인의 안식처가 되어주지 못한다. 선의 화신 같이도 보이는 공작의 모습은 사실 지독한 결핍의 모습이기도 하다. 공작은 욕망하는 능력이 없는 것이다. 이런 그의 무능은 온갖 욕망으로 가득찬 당대의 인간들과 선명하게 대비된다.
사회적 지위에 대한 욕망을 대표하는 예빤친 가와 가브릴라. 사랑의 정욕으로 인해 파멸하는 두 여인과 로고진. 이미 자신의 시간이 지난 것을 알면서도 인정과 존중을 요구하는 이볼긴 장군 그리고 삶을 박탈당하고 삶 그자체를 욕망하던 이뽈리뜨까지. 이들 모두는 공작을 때때로 증오하고 때때로 사랑하고 때때로는 두려워한다. 그것은 공작이 그들 자신을 파멸시키고 있는 욕망과 무관한 인간이기 때문일 것이며 자신들을 절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공작이 보내는 연민과 동정에 대한 혐오감에 의한 것이다.
그렇기에 공작은 파멸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는 극단적으로 자신에게 사랑을 요구하는 두 여인에게 만인에 대한 사랑을 주창한다. 그가 사상에 의해 어떤 세상을 꿈꾸고 있지만 사실 세상의 어떤 것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극의 후반부는 공작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있었을 독자들이 그가 어째서 지독한 백치였는지를 깨닫게 해주는 이 책의 가장 뛰어난 지점이다.
난 이런 공작의 우스꽝스러운 파멸이 도스토예프스키가 그 지독한 욕망을 오히려 긍정하는 것처럼 느꼈다. 논쟁의 여지가 있겠지만 한가지 확실한 것은 그가 누구보다 성실하고 치밀하게 이런 새로운 인간상을 준비했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세상엔 선이라는 단어에 대한 무조건적인 믿음으로 정의의 화신같은 주인공들이 악당을 규정짓고 처벌하는 것이 이야기의 전부인 멍청한 작품들이 범람하고 있다. 백치는 그런 작품들이 심리가 부족하다는 것을 분명히 드러낸다. 우리는 욕망을 죄로 여기지만 우리 삶의 긍정적인 감정도 사실은 상당수 욕망에 의해 작동한다. 그렇기에 극단적인 선에는 필수적으로 긍정적인 감정도 결핍한다. “신과 같이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응당한 보답을 해줄 수가 있는가?” 라는 질문은 이 세상이 사상이나 정의를 그린 정물화가 아니라 가장 치밀한 심리까지 표현된 풍경화라는 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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