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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관🎥/긴 생각

조커 리뷰, 예술의 진정한 목적과 웃음의 역할

쿠엔틴 타란티노는 조커에 대한 코멘터리에서 관객들의 가치관을 바꾸는 전복의 순간을 언급한다.  영화의 전개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의 감정을 바꿔놓았다는 뜻이다.

일반적인 영화에서 악당이란 끝에가서 몰락해야만하는 역할을 뜻한다. 그들은 개과천선 하기도하고 말그대로 망하기도하고 심할경우 죽기도한다. 악당들이 처하는 결말의 무거움은 그 배역이 저지른 행동에 대부분 비례한다. 이들에게 가해지는 형벌 자체가 보편정서에 맞지 않을땐 논란이 생기기도 하지만 그것이 관객에게 통쾌함과 카타르시스를 느낄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기 때문에 이 악당과 형벌은 영화에 빠질 수 없는 장치이다.
그렇기때문에 영화에서 악당은 더 악할수록, 더 잔인할수록 좋다. 그래야 더 쉽게 죽일수 있다.(실제로 타란티노 영화의 대부분은 그런 악당들을 선정해 기막힌 액션장면을 만들어낸다.) 만약 극악무도한 악당이 결말부에 어떤이유로 바로 용서받는 영화가 있다면 그 대처를 두고 논란이 일어날 것이다.
하지만 조커의 악당 구조는 위의 구조와 정확히 반대다. 영화의 구성상 최종보스라고 할 수 있는 인기 TV쇼 호스트 머레이는 그렇게까지 악하지 않기 때문이다. 비록 그가 착하지도 않고 아서의 코미디를 공개적으로 비웃긴했지만 ‘마땅히 죽어야할 캐릭터’ 가 되지 못한다.

그럼에도 아서가 살인을 벌일때 많은 사람들은 악당을 처리할때와 같은 카타르시스를 느끼게된다.(만약 아무도 카타르시스를 느끼지 않았다면 조커는 지금의 평가를 받지 못했을 것이다)바로 그 순간이 타란티노가 말한 가치관의 역전이다.

그러나 이 역전의 순간이 있다는 것과 그 것이 영화예술의 엄청난 성과라고 말하는건 또 다른 일이다. 누군가는 이 영화를 선동영화라고 이야기한다,  고담이란 도시 표면을 지배하는 빈부격차란 부조리를 주제로 생각한다면 영화는 그 부조리한 상황에대해 심도있게 다루지도 않고 하위층 사람들에게 상류층에 대한 분노만을 조장하는 영화로 보인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하지만 이들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기엔 여전히 문제가 있다. 무엇보다 아서가 빈부격차에 의해 직접적으로 고통받지 않고 그것에 직접적으로 분노하지도 않는다.  영화에서 현실적인 갈등을 심도있게 다루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영화를 이끌어나가는 동력이 아니기 때문이다. 영화속에서 고담의 갈등은 사람들이 조커라는 인물에 열광하게 하고 그럼으로써 아서를 DC코믹스의 ‘조커’로 각성시키기위한 장치에 가깝다.

영화 전체에서 아서가 바랬던 것은 남에게 웃음을 주고 그럼으로써 자기도 웃음을 얻는 일이었다. 웃음을 단순히 개인의 행복을 상징하는 추상적 대상이기도 하지만 또한 웃음은 영화에서 실직적인 역할을 하는 하나의 장치이며 그 자체로 모순을 내포한 요소이다. 만약 우리가 이 웃음의 진짜 역할을 이해한다면 우린 비로소 이 영화에서 아서가 무엇에 짓눌린 것인지 알 수 있게 된다.

앙리 베르그송은 자신의 저작 ‘웃음’에서 사람이 웃는 원인을 철학적으로 분석했다. 그에 따르면 세상 모든 희극성은 기계와 같은 뻣뻣함, 일종의 경직상태이다. 길거리에서 넘어지거나 상황에 맞지 않는 엉뚱한 말은 어떤 사람의 신체/사고의 유연하지못함에서 나온다. 이런 근원을 발전시켜 베르그송은 웃음이 엉뚱한 행동들을 제어하고 경각심을 주는 사회적 제스처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므로 웃음은 순전히 미학의 영역에 속한다고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웃음이 보편적 개선이라는 유익한 목표를 추구하기 때문이다(무의식적으로, 그리고 독특하지만 많은 경우에는 부도덕한 방식으로 까지 이루어진다.”

여기서 베르그송이 말하는 웃음을 바로 조커의 웃음과 연결지어 생각해보자. 아서는 웃음의 대상이 되는 사람이다 교정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웃을 수 없다 만약 아서가 웃었다면 그건 정상적이지 않은 행동이다. 그래서 아서의 웃음은 정신병처럼 취급받는다.  아서가 직업이 광대라는 것은 하나의 역설적 상태다. 그는 웃음을 전달할 필요가 없다.스스로가 웃음의 대상이 되니까(아서는 실제로 광대가 자신의 천직이라고 얘기한다). 하지만 그 광대는 웃음을 통해 행복을 주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비웃음 당하며 처벌받는 대상이다.그렇기 때문에 웃음을 주고 남에게 행복을 전해 자신의 행복을 얻고자하는 아서는 절대 그 것을 얻을 수 없다. 이과정은 “광기의 역사”에서 푸코의 말처럼 은밀하고 잔혹한 탄압이다. 사회는 그를 광인으로 규정받고 탄압된다. 그 대상은 정상을 자부하는 모든 인간들이며 그 장치중 하나가 웃음이다.

실제로 머레이는 아서의 개그를 공개적인 장소에서 조롱하고 비난한다. 이성적임을 자부하는 다수의 인간들이 그렇지 않은 인간을 비웃고 비난함으로서 바꾸고자 하는 것이다. 아서는 처음에서부터 많은 영화속 집단들이 그를 두고 갈등하는 상황에서까지 혼자였다.  이것이 조커 속 갈등이다 사회계층적이지 않고 좀더 개인적이고 그래서 더 현실적이다. 스스로 이성임을 주장하는 집단이 그렇지 않은 개개인을 광인으로 규정짓고 부조리 속에서 탄압했던 사례는 언제나 있어왔고, 지금도 다르지 않기 때문에.

첫번째 살인이 일어나는 지하철의 상황이 이런 총체적인 상황을 탁월하게 묘사한다. 아서가 병때문에 웃기 시작하자 세명의 남자는 그를 때려눕힌다. 그곳에 같이있던 여자 승객은 다른칸으로 가버린다. 아서가 정상이 아닌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가 상황을 설명하려고 했지만 그럴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이것은 비정상에 대한 현실에 대우 그 자체다. 그는 혼자다 비정상이기 때문에 지탄받거나 외면당한다.(계속 꺼졌다 켜졌다하는 지하철의 불빛이 아서를 현실세계에서 벗어나게만드는 것같다).

그러다 탕, 한발의 총소리와 함께 상황이 바뀐다. 전까지 자기를 비웃으며 폭행했던 사람이 비명을 지르며 도망간다.이 살인은 어떤 사회적인 맥락도 버리게 된다. 사회의 빈민계층이 더 높은 계급을 죽인것이 아니다. 정신병자가 시민을 죽인 순간도 아니다. 그저 한명의 인간이 자신에게 고통을 주던 사람에게 복수하는 인간적인 감정의 순간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태까지 영화를 따라가면서 아서를 지켜본 관객들은 순간적으로 이 역전에 감화된다. 그들의 도덕적이고 이성적인 관념에 상관없이 조커의 살인이 낳은 복수의 원형적인 감정을 그대로 느낄수 있었다. 그리고 바로 이 순간이 타란티노가 말한 가치관의 전복이 일어난 순간이다.

이 감정을 느낀 사람들에겐 마지막 머레이의 대사가 모순적으로 들릴 것이다. ‘세상엔 착한사람도 존재한다’.  이말은 아무 의미가 없다. 그 말자체가 세상엔 나쁜사람이 없다고 증명할 수 없기 때문이며 오히려 나쁜사람의 존재를 들킬까봐 두려워하는 말로까지 들린다. 그렇게 이 나쁜 사람들이 있다면 아서가 자신의 어리숙함을 비웃음으로 단죄하고 괴롭히는 인간들에게  분노하는 감정이 왜 존재해선 안되는 것인가?

훌륭한 영화, 예술은 언제나 관객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그 질문이 예리하고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라면 예술로서 더 뛰어나다고 할 수 있다. 바로 그런점에서 조커란 영화의 훌륭함이 있다. 어떤 질문을 두고 영화예술을 통해 관객들을 그 질문으로 이끌어간다. 그리고 그 영화적 체험을 한 사람들은 스스로에게 한번도 해본적없는 질문과 마주한다. “우린 과연 정상인가? 만약 그렇다면 조커의 복수는 왜이리 달콤한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