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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관🎥/긴 생각

더 배트맨 THE BATMAN(2022) 리뷰

by 신그자체김상범 2022. 3. 11.

 

 배트맨은 히어로 영화의 기준점이었다. 첫 번째 배트맨은 말 그대로 히어로 영화의 효시로서 그 가능성을 보여줬고, 다크 나이트 3부작의 배트맨은 장르가 보여줄 수 있는 한계점을 들여다보게 했다. 그 영화 속에서  마블을 필두로 한 히어로 장르의 대폭발 시기에도 배트맨의 아성을 넘보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히어로 물이라는 장르는 자신의 변곡점을 지나고 있다. 제작사는 히어로 장르의 티켓파워에 취해버렸고 여러 편의 영화의 플롯을 이어버렸다. 결국 각각의 영화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관객에게 전달하면서도 그 눈은 다음 개봉될 영화를 바라보고 있어야 하는 난제에 빠졌다. 제한된 러닝타임을 두고 펼치는 적자생존에서 액션이 살아남는다.  캐릭터와 서사는 양적으론 유지되지만 질적으로 급격히 단순해진다. -이를테면 디즈니의 가족주의가 그것이다 짧은 시간에 가장 이입하기 쉬운 캐릭터인 가족을 등장시키고 가족을 지키기 위한 싸움이라는 동기를 부여한다-. 마틴 스콜세지가 마블 영화를 두고 영화가 아닌 놀이공원 같다고 이야기한 것은 이와 연관돼있다. 관람자의 스릴에 집중한 영화 구성, 마치 롤러코스터의 조형물들처럼 미리 정해진 것 같은 캐릭터들 다 타고난 다음에도 한참이나 남아있는 다른(하지만 기능적으론 같은) 놀이기구들

 

 배트맨 역시 이 흐름에서 벗어나진 못했다. 제작사 DC가 내놓은 영화들 역시 위의 기준들에 명백히 부합하는 (영화의 갈등해소에 사용되는 그들의 가족들, 마치 예습이라도 시켜주는 듯 다음 영화 캐릭터들 등장시키는 장면들) 공식들 속에서 그 배트맨 역시 자신의 위상을 잃어버릴 뻔했다. 그랬던 배트맨이 10년 만에 그 단독 영화로서 다시 우리에게 돌아온 것이다.

 

밤하늘의 불꽃놀이같이 환상적인 영화,
빛바랜 딜레마

 10년만의 귀환을 모두에게 알리려는 듯이, 영화는 말 그대로 폭발한다. 무엇보다 배트맨의 상징 중 하나인 어둠을 사용하는 데 있어서 탁월하다. 집요하게 어둠에 가려진 공간을 의식하고, 행여나 그 어둠에서 배트맨이 등장할 때 이어지는 전투 장면은 어두운 밤하늘에서 터지는 폭죽들처럼 아 화려하다. 특히 이번 영화는 공포로서의 배트맨의 모습을 강조했는데, 때때로 그와 적대하는 악당의 시점을 보여주는 씬에서의 배트맨의 모습은 실로 보는 관객마저 압도한다. 이외에도 영화 곳곳에 등장하는 가상의 도시 고담 역시 여태껏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등장해 영화에 화려함을 더한다.

 

 배트맨 영화의 전통적인 강점인 플롯역시 고스란히 녹아있다. 이렇게 압도적인 배트맨과 그를 앞에 두고도 전혀 뒤지지 않는 포스의 리들러 둘의 미묘한 관계를 중심으로, 마치 탐정 영화처럼 배트맨이 리들러의 미스터리를 파 해쳐 나가는 플롯은 두 캐릭터의 존재감을 끊임없이 강화하면서도 이야기를 전달하는 좋은 장치 역할을 한다

 

 

 하지만 배트맨이라는 영화를 다른 어떤 히어로 장르보다 빛나게 해주는 건 배트맨이란 캐릭터가 자체가 갖는 현실성이다. 과거의 강한 트라우마로 인해 갖게된 정의감과 그럼에도 인간수준에 불과한 강함 때문에 모든 갈등을 손쉽게 해결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고뇌. 그러면서도 자신이 스스로 정한 정의에 모순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유일무이한 히어로, 즉 배트맨은 딜레마의 히어로다. 그는 히어로이면서 현실의 우리와도 같다. 도덕적인 삶을 선택한 사람들이 한 번쯤 ‘나의 의지를 관철시키기 위해 위해 폭력을 사용하여도 될까?’ 라는 고민을 하는 것처럼 배트맨 자신의 행동을 주저한다. 다크 나이트에서 그가 하비 덴트를 끝까지 빛의 기사로 세우려 했던 이유도 정의라는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기 위해 폭력을 사용하는 것이 또 다른 의지 -이를테면 돈이나 권력- 를 위해 폭력을 사용하는 범죄자들과 다를 게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래 내용에는 더 배트맨, 다크나이트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의 배트맨은 앞의 모순에서 어느 정도 벗어났다. 그는 복수로서 태어났다. 그 복수는 과거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것이다. 자신의 정의와도 같았던 아버지를 죽인 악을 단죄하고자 하는 감정에서 복수를 하는 것이다. 그가 스스로를 복수라고 부르면서 딜레마는 일시적으로 해소된다. 비록 과거의 정의를 위한 복수일 지라도, 감정적인 복수를 위해 폭력을 사용하는 것은 모순이 아니다.

 

그렇지만 복수 자체가 된 배트맨은 더이상 정의가 될 수도 없다. 정의는 폭력을 포함한 복수를 정의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선 도덕과 정의는 존재할 수 없다. 하지만 리들러의 가장 큰 질문이 이 상식을 관통한다. '과연 정의는 폭력적이지 않은가?'

”잔인해질 수도 있고 시적일 수도 있고 눈먼 것일 수도 있지만 부정당한다면 폭력이 될 수도 있는 것”의 답이 어째서 정의일까

리들러가 감옥에서 배트맨에게 우리가 같다고 말한 건 무엇이며. 어째서 그 말을 들은 배트맨은 전에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던 분노를 격하게 쏟아낼까.

 

 리들러는 스스로를 정의라고 자부하는 자들이 자행하는 폭력을 세상에 고발했다. 이는 스스로의 이익을 위해 정의를 사칭하는 사람들에 대해서이기도 하지만 상대를 악으로 규정한 정의가 행하는 무자비함에 대한 고발이기도 하다. 전자는 바로 리들러의 희생양이었던 부패한 인사들이며, 후자는 배트맨에 대한 것이다.  비록 그가 복수라는 형식을 쓰면서 스스로 정의에서 멀어졌음에도 여전히 그는 정의를 추종하는 사람이다. 그가 이전 배트맨과 달리 아버지를 살해한 범인의 존재를 찾는 것 직접적으로 찾아 복수하고 싶어 하는 것 역시 그것이 자신의 정의, 아버지를 위한다고 생각하기 때문 아닌가. 그런데 리들러 역시 복수의 화신이었던 것이다. 자신을 이렇게 만든 사람들에게 복수하는 게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사람에게 복수하는 것과 어떻게 다를 수 있을까.

 

 이런 주장을 방어하기 위해 배트맨이 스스로 만든 불살이라는 규칙 역시 리들러의 질문 앞에서는 무력하다. 이런 특성 역시 팔코네를 살해하는 마지막 장면에서 명백히 드러난다. 배트맨은 자신이 악이라 규정한 리들러의 정체를 알기위해 그가 마련한 수수께끼를 풀어나간다. 결국 쥐(팔코네)를 빛나는 길거리 조명 앞까지 데려간 순간 리들러가 쏜 총에 팔코네가 죽는다. 안전한 지역에 있던 그를 위험한 위치까지 끌어내고 리들러가 직접 죽인다. 이 모든 일들이 원래 하나의 일인 것처럼 자연스럽다. 배트맨의 폭력은 팔코네를 죽음으로 밀어 넣진 않았지만 사실상 그것과 마찬가지인 결과를 낳은 것이다. 감옥에서 그가 이런 사실을 언급하자마자 배트맨이 분노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것이 복수이지만 옳기를 바랐던 배트맨의 정체성 자체를 부정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영화는 시종일관 흥미로운 질문을 통해 배트맨의 딜레마를 부활시켰다.이 딜레마는  토마스 웨인의 과거 행적이 밝혀지는 순간은 영화는 정점을 찍지만, 영화 후반 부분에서 그 흐름을 유지하지 못한다. 배트맨이 과거의 복수를 버리고 미래라는 반대방향의 정의를 위해 일하겠음을 선언하면서 그의 딜레마를 해결하려 하는데 이 선택이 앞의 질문을 무색하게 만들어버린 것이다

 

우선 별안간 영화는 곧바로 토마스 웨인의 논란이 사실이 아니란 것처럼 얼버무린다. 내가 믿었던 정의가 거짓된 것이었다면 내 복수는 정당했나?라는 질문이 그의 딜레마를 해결해줄 매우 장치였음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서둘러 이를 무마시켜 배트맨의 여태까지 행동이 잘못되지 않았다고 설명하려 한다. 

 또한 복수라는 주제를 통해 서로의 대척점에 있던 리들러와의 균형, 배트맨의 정체성 역시, 결국 리들러가 스스로 복수의 범주에서 벗어나면서 무너진다. 둘은 자신을 해입힌 대상에 대한 복수를 한다는 점에서 같았으나, 리들러가 전혀 무관한 사람들을 죽이고자 하면서 과거의 배트맨이 리들러와는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려 한다.

 

 그러나 이건 사실상 도돌이표와 다름없다. 이를 명백히 보여주는 것이 크리스토퍼 놀란의 또 다른 배트맨, 다크 나이트다. 다크 나이트에서 배트맨은 결말부에 실제로 투 페이스를 떨어뜨려 죽이고 그들과 같은 사람이 되어 정의에게 쫓기는 신세가 된다. 그것이 폭력을 사용했던 정의가 가지는 당연한 한계점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그는 폭력이 정의가 될 수 없다는 신념을 끝까지 지키면서 동시에 자신이 믿었던 정의를 지키게 되지만, 더 배트맨의 배트맨은 다시 한번 정의의 주먹이 되며 아무렇지 않게 정의의 규칙의 예외가 돼버린다.

 

 물론 이런 모순이 있더라도 더 배트맨이란 영화가 매력적이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영화는 점점 놀이 기구화돼가고 있는 히어로 영화 장르에 스스로가 가질 수 있는 깊이를 상기시킨다. 다만 이 더 배트맨에서 가장 날카로운 대사가 리들러의 정의에 대한 질문인 것 역시 사실이다. 우리가 정의라고 믿는 것이 폭력을 사용할 때 우린 과연 그걸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들여야 할까? 정의는 폭력적이 될 수 없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