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영화는 욕망과 이성이라는 이분법을 통해 욕망의 본질을 다룬다.
주인공은 피아니스트이자 피아노 교사이다. 음악은 모든 예술 중에서 가장 이성과 비이성이 혼합되어 있는 장르라는 것을 염두에 두었을 때 주인공이 음악을 바라보는 태도는 엄밀함과 이성이라고 할 수 있다.
악보에 나타난 감성을 해석하고 구현하는 것을 중시한다는 것이다. 그가 엄청나게 이름 높은 음악 학원의 교수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그녀의 이성과 엄밀함의 수준을 강조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녀에게선 강력한 도착증의 징후가 보인다. 자해와 피학성애, 관음증, 노상 방뇨는 영화 내내 갑작스럽게 관객들에게 공개되고 극의 후반부가 될수록 관객들은 이 도착증의 크기가 그녀의 지성이 가냘픈 껍데기에 불과할 정도로 깊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런 왜곡된 주인공의 감정은 주인공의 지성에 의한 것으로 해석된다. 그녀의 가정환경과도 관련 있어 보이는 절제, 스스로에 대한 구속이 이런 욕망을 낳았다. 욕망이 마음속 빈 공간의 모양을 갖기 때문이다. 즉 그녀는 자신이 가지지 못한 정욕과 욕망을 꿈꾼다.
하지만 그녀의 이성은 그 욕망이 실현 불가능하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이런 모순적인 상황의 결과로 그녀의 욕망은 자기 자신이 통제 불가능한 욕망의 대상이 되는 피학 성애의 형태로 실현된다.
그 상황에서 자신을 사랑하는 젊은 남자의 등장은 모순 속에서 고착화된 주인공의 삶을 바꿔버린다. 그 둘이 음악을 대하는 자세부터 다른 것처럼, 남자는 자기감정과 욕망에 끊임없이 솔직하다. 주인공은 남자의 구애를 원하면서도 이성의 힘으로 그것을 배척하지만, 수치심을 모르는 복수 행위로 그녀의 마음은 드러나게 된다.
하지만 이 둘의 사랑은 주인공의 모순으로 인해 절대 유지될 수 없었다. 그녀의 욕망은 피학 성애의 모습으로 드러났지만, 그녀는 여전히 그 피학 성애를 포함한 통제 불가능함을 두려워한다. 이런 극심한 모순은 자신의 성적 판타지를 드러내며 저항마저 무시하고 지배해달라는 것을 편지로 남자에게 지시하는 주인공 우스꽝스러운 행동에서 드러난다. 그리고 주인공의 반대급부인 남자는 사랑인지 범죄인지도 알 수 없을 스펙트럼으로 항상 주인공의 환경을 그의 예상 밖으로 바꿔놓는다. 여기서 주인공은 어떤 쾌락도 느끼지 못한다. 그녀의 욕망 형태인 피학성애가 부정된 것이다.
주인공의 욕망에 부정은 그녀의 삶에 대한 부정과 마찬가지이다. 그녀의 삶이 이런 뒤틀린 욕망을 낳았음에도 그것이 해소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남은 건 결핍뿐인 삶이다. 그렇기에 주인공은 자기 삶에서 도망친다. 결말을 장식하는 칼은 주인공이 남자를 죽이기 위해 가져간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연주회에서 남자와 만난 뒤에 주인공은 칼로 자기 살을 도려낸다. 나에겐 그것이 남자의 태도 때문으로 보였다. 남자는 본인과 주인공이 원하든 원하지 않았든 그런 무자비한 폭력을 저질렀음에도 어떤 변화도 없어 보인다. 그가 그저 욕망한 대로 행동했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어떤 갈등도 없다. 거기서 주인공의 분노 대상은 자신으로 바뀐다. 그녀의 마지막 자해행위는 초반에 나왔던 쾌락을 위한 자해와는 전혀 다르다. 이제까지의 삶의 모순에 대해 깨닫고 반성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반성했기에 도망칠 수 있었다. 영화가 어떠한 해결도 없이 끝나는 것도 이런 주인공의 내적 갈등이 해소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결핍으로인해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했던 주인공이 그것을 무엇을 찾기 위해 행동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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