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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관🎥/긴 생각

영화 롤리타(1962) 리뷰

by 신그자체김상범 2022. 8. 21.

 

욕망과 사랑의 불가분성 ★★★★☆

이 리뷰는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화 <롤리타>는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스탠리 큐브릭의 촉 장편영화이다. 스스로 문제가 되는 걸 피하지 않는 작품이 흔히 그렇듯 많은 비판을 받았지만 한편으론 아직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풀 메탈 재킷과 같은 신인감독 스탠리 큐브릭에 대한 찬사와 기대 또한 쏟아졌다.

이런 극단적인 소재를 가진 작품은 사람들로 하여금 풍자극이나 교훈극을 떠올리게 한다. 이 두 가지의 형식은 모두 해당 소재 자체를 비판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멀리하게 하기 위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롤리타 역시 이런 풍자극, 교훈극의 구성을 가지고 있다. 특히 이후에도 시계태엽 오렌지, 닥터 스트레인지러브 같은 완성도 높은 풍자극을 만들어낸 스탠리 큐브릭의 실력은 롤리타에서도 어김없이 발휘된다.

그러나 롤리타에서 풍자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험버트의 소아성애 단 하나라고 보기는 애매하다. 오히려 사회 전체가 우스갯거리로 보인다. 영화의 전반부 램스 데일의 이야기에는 유럽의 이미지들을 선망해, 고상함, 예술적임을 추구하는 미국인들의 사회적 얼굴과 그들의 피상적인 관계가 계속해서 등장한다. 하지만 이 얇고 피상적인 관계를 넘어 보이는 것은 성과 욕망에 대한 은밀한 집착이다. 하지만 이것이 당대의 미국인에 대한 풍자라고만 은 생각할 수 없다. 나보코프는 한 인터뷰에서 롤리타가 미국의 어색한 부르주아 사회를 풍자하려는 것이 아니고 미국의 방식이 유럽과 다르지 않다고 언급했다. 무엇보다 영국인인 험버트 또한 이들과 완전히 같은, 그러나 더 위험한 이중성을 갖고 있으니 이 이중성은 한 시대, 한 장소에 국한되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영화의 후반부에서 험버트는 이런 양면성을 거의 잃어버린다. 영국 신사로서 미국인들보다 능숙하게 본인의 양면성을 조절했던 것과는 반대로 그가 롤리타에게 가진 욕망은 너무 쉽게 집착으로 바뀌어 버린다. 그리고 이것은 점점 더 심해져 험버트는 로리타와의 비밀스러운 관계를 거의 숨길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제임스 메이슨의 연기와 영화에 쓰인 대사들은 이를 소름 끼치도록 현실적으로 묘사해 보는 이들은 자신보다 약한 사람을 욕망하려 하는 사람이 그들을 통제하려 하는 일이 얼마나 쉽게 일어나는지 깨닫게 한다.

하지만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는 그가 마지막 진실을 알게 된 이후 장면들이다. 상대방에 대한 통제와 집착으로 가득 찼던 험버트의 욕망 속 어느 한편에 사랑으로 보이는 감정이 드러난다. 롤리타에 대한 한 인터뷰에서 큐브릭은 ‘홈 버트가 자신의 사랑을 갑작스럽게 깨닫는 것은 이 이야기의 가장 가슴 아픈 요소 중 하나'라고 밝히며 실제 영화에서도 이 장면을 드라마틱 하게 연출한다. 이 마지막 장면, 그리고 험버트가 롤리타에 대해 집착하는 이전 장면들이 우리에게 주는 괴리감은 욕망과 사랑의 관계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사랑은 욕망과 무관한가?’ 사랑을 정의하는 것은 감정을 기반으로 하든 두 사람 사이의 관계를 기반으로 하든 매우 어려운 일이다. 단지 경험적으로 우리가 사랑의 이전에 상대방을 원하는 감정 즉 욕망을 느꼈다면 생각한다면, 욕망이 사랑과 관계가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험버트와 롤리타의 관계에 보이는 것이라곤 그의 이기적인 욕망, 그에 따른 집착뿐이었다. 다만 중요한 것은 그 폭포 같은 욕망에서 그녀에 대한 사랑이 따라 들어온 적이 있을지 또는 그것이 가능한 일인지에 대한 것이다.

더 이상 그가 롤리타를 가질 수도 없다는 사실과, 심지어 한 번도 가진 적이 없었다는 (롤리타는 매우 강하고 자주적이었기 때문에) 그녀의 폭로 이후에 어찌할 수 없는 상태에서 험버트의 뒤틀린 욕망은 씻겨나간다. 그리고 욕망이 사라진 상태에서 그는 더 이상 욕망하지 않는 롤리타를 돕지 않고 떠나갈 수 있었고 자신을 배신한 (인과응보일지라도 ) 그녀에게 분노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도 그가 롤리타를 위한 행동을 하는 것은 그간 욕망에 가려져있던 어떤 사랑의 모습이라고 큐브릭은 이야기한다.